[스크랩] 관상(觀想)기도’의 실상을 밝힌다.
‘관상(觀想)기도’의 실상을 밝힌다 글/림헌원 목사(한돌교회)
“관상추종자들은 성경적 해석과 기도의 방법론 왜곡하지 말아야”
시작하는 말 미국과 한국의 교계에 불고 있는 관상(觀想)기도는 다양한 이름으로 위장하여 표현되어 각 개신교계 교단의 교회 속에 침투 되고 있다. 관상기도는 경청기도, 침묵기도, 숨(호흡)기도, 마음기도, 향심(向心)기도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위장하여 교회 안에 들어와 개신교의 신앙과 성경적 가르침의 뿌리를 은근히 뒤흔들며 미혹하고 있는 실정이다.
관상기도 추종자들은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 구절들이 많이 있다”라고 주장하며 관상기도가 매우 성경적인 것인 양 위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인터넷에 올라온 관상 추종자들의 글들을 보면 관상기도의 실체는 숨겨 버린 채 온갖 미사여구로 교묘히 치장하여 덮어씌우고 뜬구름 잡는 듯한 관상의 이야기만을 늘어놓고 있을 뿐이다. 다행히 관상 지지자 중에 한신대학교의 K 교수가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라고 하여 매우 용감(?)하게 인터넷에 공개 제시하므로 인터넷과 각종 지면상에서 토론을 시작할 수 있는 단초가 되어 세상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분별력의 시야를 넓혀 줄 기회가 찾아오게 되었다. 이에 대부분의 관상추종자들이 내세운 대표적 성경구절들의 인용이 관상기도를 억지로 정당화하려는 황당무계한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뉴스엔조이 사이트에 K 교수가 제시한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 구절의 해석에 대해서 비교적 짧게 반론하는 비판을 전개하고자 한다.
1. 이사야 30:15의 제시에 대한 반론 그들은 “관상기도를 해야 한다는 성경적 근거는 무수히 많다. 지면 관계상 구약과 신약의 대표적 본문을 몇 개 언급하도록 한다. 영성의 분야에서 미국과 한국에서 많은 독자를 지니고 있는 유진 피터슨이 <관상적 목회자>란 책에서 목회자는 밖으로 분주하기보다는 주님 안에서 잠잠하여야 한다고 이사야서 30장 15절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란 말씀의 예를 들어 책망했다” 고 주장하고 있다.
2. 시편 46:10의 제시에 대한 반론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 하는 말은 ‘너희가 하나님의 행적의 증거를 찾아 조용히 보고 믿으라’ 하는 뜻이다. 곧 조용히 하라는 것은 과거 하나님이 행하신 행적들을 가만히 보고 되새김질(음미, 또는 묵상)하여 보고 하나님 됨을 믿으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행적이라 한다면 구약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약하지만 이기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다양한 하나님의 행적들을 지시하고 있다.
▶ <반론> : 본문을 문맥 속에서 살펴본 뜻은 하나님은 물리적으로 나타나지 않으시고 영적으로 나타나신다는 의미이다. 요란하게 외부적으로 물리현상 가운데 나타나시지 않고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세미하다’는 것은 내적으로 은밀하게 나타나시는 하나님, 내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인데 ‘세미한’이란 말은 ‘물리적인 외부의 것들이 조용하다’는 것이지 ‘엘리야가 조용하여 관상기도를 했다’는 근거가 될 수가 없다. 그리고 구약시대 하나님의 임재 방식은 선지자가 원하여서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고 갑자기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임하셨다. 즉 하나님 편향적인 말씀이 임하신 것이지 우리의 기구적인 말씀이 아니었다. 우리가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기다려서 듣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만들고 기다려라’ 고 말씀하신 바 없다.
▶ <반론> :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는 말씀을 동거동행으로 해석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관상기도를 통해서 한다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요한복음 14장 10절과 14장 20절은 14장 전체 문맥 가운데서 살펴볼 때, 결국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지켜 행하는 자에게 당신을 나타내시고 함께 하시겠다는 뜻이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 14:23).
이처럼 동거동행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하나 되는 연합사상을 말한다. 제 삼자가 아닌 일자가 되는 하나님의 역사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을 뜻하는 것이다. 귀하고 복되신 말씀 사이에 관상의 의미를 끼워 넣으려는 시도 자체가 함정이다. 관상가들이 말씀의 좋은 말 사이에 관상기도의 의미를 끼워 넣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관상의 상품을 멋있게 포장하여 선전하니 많은 목사와 연약한 성도들이 미혹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주님께서 연합하기 위하여 임재 하실 때 우리는 주님의 능력과 은혜를 믿고 심령의 문을 엶으로써 하나님과의 연합은 성취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총과 능력에 의해서 성취될 뿐 침묵이라는 인간의 방법이 게재된다는 것을 본문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의 연합 사이에 침묵을 삽입하는 것은 그들의 임의적인 입장일 뿐 성경의 입장이 아님은 더욱 분명해 진다. 침묵하여 마음의 입술로 깊고 크게 부르짖는 기도를 한다면 좋겠지만 관상기도의 실체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관상기도는 침묵기도에서 파생된 새로운 양태의 이방 종교의 인본주의적 기도 형태이다. 침묵만 하려들고 거기에 인도의 명상과 만트라(주문)식으로 짧은 내용을 반복하여 중언부언하는 것은 분명 이교도의 명상에 말씀 몇 구절을 얹혀 놓은 것으로 초월적 명상행위와 그 차이가 없는 인본주의, 신비주의, 신영지주의, 뉴에이지로서 미래로는 종교다원주의(모든 종교에는 각기 특별한 구원의 법이 있으니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여 세계 모든 종교를 평화적으로 통일하자는 입장)와 맥을 같이 하게 되는 비성경적 흐름을 막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경건한 기독교의 성경적 해석과 기도의 방법론을 왜곡하지 말고 모든 종교를 통합할 수 있고 종교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서로 넘나들게 할 수 있는 용어인 ‘영성’과 ‘관상’이라는 용어 사용과 그 구체적인 방법과 실제 행위들을 일거에 내어다 버리길 바란다.
그리고 매스컴에 자주 오르는 일부 대형교회 유명 목사들과 추종하는 젊은 목회자들이 관상기도 관련 영성기도 행위를 이 시대의 최고의 영성신학이라고 주장하며 교회성장의 한 방법으로 목회 현장에 도입하고 있는 실정은 ‘기도’에 대한 성경적 정체성의 혼란을 야기시키고 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일로 매우 우려되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와 관련하여 신학적으로 증명하여 공교회의 정체성에 배치되거나 혼란이 야기될 경우 등에 대한 대처 방안을 교단 차원에서 제시해야 마땅하다고 사료 된다. <기독교개혁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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